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과 가마쿠라(鎌倉)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께서는 겐쵸(建長) 5년(1253), 32세때 고향인 아와국(安房國) 세이쵸지(淸澄寺)에서 “南無妙法蓮華經”의 종지(宗旨)를 건립하시고, 그때부터 가마쿠라(鎌倉)에서 본격적인 포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이후 분네이(文永) 8년(1271) 9월 12일, 다쓰노구치(龍口) 법난의 발적현본(發迹顯本, 다음 쪽을 참조)을 하시기 까지, 이즈(伊豆)로 유배를 가셨던 시기를 제외하면, 오랫동안 가마쿠라에 계시면서 절복과 묘법유포에 진력하셨습니다.
 분노(文応) 원년(1260) 7월 16일에는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막부에 제출하시어 염불종, 선종 등에게 구제를 바라는 막부의 자세를 엄중히 간계(諫戒)하셨습니다. 나라에 악법이 퍼지면, 타국침핍난(他國侵逼難, 외국의 침략을 받는 난)과 자계반역난(自界叛逆難, 자기편끼리 싸우게 되는 난)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예증(豫證)하시고, 유일한 정법인 妙法蓮華經에 귀의해야 한다는 것을 설하신 것이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입니다.
 분네이(文永) 5년(1268) 이후, 몽고의 사신이 와서 예증이 현실로 되었으며, 대성인께서는 막부의 요인들과 가마쿠라의 대사원에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재고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십일통어서(十一通御書) 등〕을 보내셨습니다.

다쓰노구치법난(龍口法難)

 이렇게 가마쿠라에서 포교를 하신 대성인께서는, 막부와 연결되어 있는 타종파 사람들의 모략을 받게 되어, 사무라이 도코로(侍所)의 부관이었던 헤이노 사에몬노죠 요리쓰나(平左衛門尉頼綱)가 분네이(文永) 8년(1271) 9월 12일에 대성인을 포박하여 그날 밤 중으로 몰래 다쓰노구치(竜口)로 연행하여 참수하려고 획책하였습니다. 이것이 다쓰노구치법난(龍口法難)입니다.
 다쓰노구치(龍口)에서는 참수를 하기 직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에노시마(江島) 방향에서 둥근 빛 덩어리가 출현하여 날아왔고, 이에 혼비백산한 무사들이 공포에 전율하여, 결국 참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대성인께서는 사도(佐渡)로 유배되셨습니다.

발적현본(発迹顕本)

 부처님께서 임시의 모습을 벗고, 본래의 경계(境界)를 나타내시는 것을 발적현본(發迹顯本)이라고 합니다. 법화경의 행자로서 거동하신 대성인께서는 다쓰노구치법난 때에 내증(内証, 마음속의 깨달음)에서 본불님의 경계(境界)를 여셨습니다.
 이것은 『개목초(開目抄)』의 한 구절 등에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니치렌(日蓮)은 다쓰노구치(龍口)의 참수장에서 범부(凡夫)의 목숨을 버리고, 구원원초(久遠元初)의 본불(本佛)의 혼백를 나타내어 사도국(佐渡國)으로 건너왔다」(취지)라는 뜻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께서 다쓰노구치 법난 이후, 처음으로 본존님을 도현하신 것도 본불님의 거동이기 때문입니다.
고안(弘安) 2년(1279) 10월 12일, 대성인께서는 출세(出世)의 본회(本懐)로서 말법의 일체중생이 귀의해야 되는 본문계단(本門戒壇)의 대어본존(大御本尊)님을 도현하시고, 고안(弘安) 5년(1282) 10월 13일, 안상(安祥)히 입멸하셨습니다.